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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 무릎
   
 
  도서코드 >>  76178
  도 서 명 >>  비전 무릎
  출 판 사 >>  규장
  저 자 >>  전병욱
  상 태 >> 
  출판년도 >>  2000
  포인트 >>  20 원
  판매가격 >>  4,500
  구입수량 >>   재고:1권(개)
 
서 적 소 개
세상을 정복한다!

청년들의 심장에 아로새긴 인생부흥의 필사록!!
세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밥이다.
기도의 힘, 비전의 힘으로 시대를 휘어잡는다!

파워전병욱목사가 시편에서 갓 퍼올린 리얼타임 파워메시지!!!


기도무릎은 비전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시편이 박은 부흥의 시추공(詩錐孔)을 통해
펑펑펑 솟아오르는 비전생수,
아직도 갈 바를 모르고 허송세월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물벼락처럼 쏟아 붓는 역전의 은혜를 맛보라

원망을 감사로,
열등감을 자신감으로,
자조적 성격을 참여하는 성품으로,
외톨이 믿음을 공동체 중심의 신앙으로 확, 바꾸는 비전의 볼쏘시개가 나를 들춘다.

관행을 뒤집고 상식을 물구나무 세우는
\"새벽무릎\", \"부흥.com\"의 영적 레디컬리스트 전병욱목사
그가 부르는 비전 노래. 기도의 함성.

<비전 무릎>은 모든 진리의 검증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목회 철학에 근간을 둔 시편 강해집이다. 묵상과 무릎으로 시작했으나 항상 설교의 결론은 \'비전\'으로 끝맺게 되었다는 그의 변처럼 이 책은 비전을 확신하여 비척거림이나 흔들림 없이 그 길로 매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열매맺는 삶의 필사록이 될 것이다.


프롤로그 5~27쪽]

\'거울\' 시각에서 \'창\' 시각으로 전환하라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깊은 고뇌에 잠긴 적이 있다. 설교를 잘한다는 어느 목사님과 나 자신을 비교해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과 나를 비교해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잘했다고 칭찬하실 까? 쓸데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분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그분의 책은 성경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철저하게 분석해서 설교한 내용을 담은 설교 집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설 교문들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왜? 텍스트(text, 성경)는 있는데, 너무 콘텍스트(context, 상황)가 약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증거 하는 것만이 청교도적인 모습이요 성경 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다. 모든 진리의 검증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현실 속에서 진리를 검증하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을 딱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그 한 권의 책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모든 주장들은 다 무시해버린다. 즉, 객관성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직이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이 명제는 참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이 지지하는 올바른 명제이다. 그런데 세상을 이 한 가지 명제의 진리로 다 설명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 한 가지 진리만 가지고는 결코 세상을 설명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직이란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붙들고 세상에 나갔다고 하자. 이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지나치게 못생긴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못생긴 여자를 보고는 정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참 못생겼네요. 하나님도 이런 실수를 하실 때가 다 있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이 사람이 못생긴 여자를 못생겼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에는 아마 썰렁한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고, 좀 못생기고 못된 여자를 만나는 최악의 상황이라면, 여자로부터 따귀가 날아오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아, 사실을 사실대로만 말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럴 때는 사실이지만 말하지 않는 것, 또는 \'당신은 참 개성 있게 생겼네요.\'라고 말하는 것이 \'예절\'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이 사람은 상황 속에서 \"정직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과 함께 \"사실이라도 표현하지 않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의\"라는 또 다른 명제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배운 모든 진리를 현실 속에서 검증해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세상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진리의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그 명제들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책상신학자들이 쓴 책이 현실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은 다 옳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만 강조하기 때문에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그들은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 하는 성도들이 되고 만다. 아무리 주옥같은 말씀이 선포된다 하더라도, 세상에서는 무력하고 이원론적인 성도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찌 성도들만의 책임이라고 매도할 수 있겠는가? 그 상당 부분의 책임은 설교자에게 있고, 책상신학에서 나온 설교에 있는 것이다.

성경으로 세상을 해석하라

나는 성경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거울(mirror)로 사용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창(window)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선 성경을 거울로 사용하는 방법을 보자. 이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이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범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 방법이다. 말씀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원동력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 도전서 10:5 이하의 말씀이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은 우상 숭배하다가 다 죽었다. 그러니 우리는 우상숭배하지 말자. 어떤 사람은 간음하다가 하루아침에 이만 삼천이 죽었다. 그러니 우리는 간음하지 말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다 죽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 바로 이런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이다. 이런 메시지를 살피는 것이 성경을 거울로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을 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해석하고,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시각을 가지고 일반 시사잡지 「타임」 같은 것을 분석하고, 성경의 시각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바라보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거울로 사용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사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만 머무는 것은 잠재적인 범죄이다. 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만 가두어두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만 가두어두려고 하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소망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능력 있고 확실한 힘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창(window)으로 사용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바이다.

나는 기회가 있는 대로 누누이 이렇게 말해왔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 그들이 쿠데타를 벌이면, 제일 먼저 대학과 정부기관, 언론기관을 점령한다. 왜? 그곳이 이 사회의 파워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을 점령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이 대학과 정부와 언론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인재를 키워야 하고, 그곳에 인재를 보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지난해 우리 교회에서는 새로 온 사람까지 합쳐 모두 7명이 사법고시에 붙었다. 물론 다른 교회들에도 많은 변호사, 판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그들과는 차별성이 있다고 본다. 왜? 이들은 양육 받은 인재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들은 말씀으로 훈련받은 인재라는 점 때문이다. 이들은 리더로서 훈련받고, 철야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훈련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인재들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그냥 교회에 등록되어 있는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많은 기독실업인들이 있다고 하면서도, 경제현장에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훈련받은 인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과 같은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말씀으로 훈련받은 인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명하다.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으로 훈련받은 인재를 배출하여 사회를 장악하는 것이다. 나의 소망은 이것이다. 성경을 거울과 창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하고, 특별히 성경을 거울(mirror)로서뿐 아니라 창(window)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인재들을 사회로 배출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준비시키라

삼일교회는 젊은이들이 많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모이다보니, 최근에 새롭게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많다. 청년의 때는 바쁜 때이다. 그리고 할 일도 엄청나게 많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에서 가장 분주한 시기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다 못 마친 공부를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기반을 잡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녀야 한다. 도저히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의 분주한 인생들을 살아가야 할 때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청년의 때에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한다는 사실이다. 아이 하나 키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정들은 인생의 가장 분주한 시기에 아이를 낳아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며 자녀를 양육한다. 무슨 말인가?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분주한 인생을 살더라도 그 다음세대를 위한 생명의 전수와 양육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각 세대가 단절되지 않고,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계승을 게을리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 \"장년들 문제로도 코가 석자인데, 청년들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교회들이 있다. 심지어 \"청년들은 헌금도 안 나오고, 교회에 대한 기여도 없으며, 조금 있으면 다 떠날 사람들인데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투자하느냐?\"고 외치는 사람들까지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자녀를 낳아놓고는 \"그 아이가 가계에 도움이 되는 것도, 집안 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키워놓으면 시집가고 장가갈 텐데 키워서 뭐 하냐?\"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다.

도대체 왜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인가? 한마디로 영적으로 무식해서 그렇다. 신앙 계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망발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성장세대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신명기 5장을 보면, 십계명이 나온다. 그리고 신명기 6장에 보통 쉐마라고 하는 교육에 관한 메시지가 나온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11계명이라 생각한다. 11계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가르치라, 양육하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위해 10계명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10계명의 모든 내용을 다음세대와 그 계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수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였다. 믿음의 계승, 믿음의 전파를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리 풍성한 생명도 계승이 없으면 단절되어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사기의 암흑시대가 온 이유가 무엇인가? 신앙 계승의 실패 때문이다. 사사기 2:10을 보면,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신앙 전수의 실패는 곧바로 신앙의 암흑시대를 도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계승의 실패는 \'잠재적 몰락\'의 전조라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말씀이 들려지게 하라

지금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를 떠나는 청년 몇 사람을 붙들고 단순하게 물어만 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반 사회를 보라. 그들은 어떤 부분에서 실패를 하면, 그 분야에서 성공을 이룰 때까지 연구하고, 시도하고, 변화시키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래서 결국 문제를 해결해내고야 만다. 그런데 교회는 만사태평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한 도덕적 해이 상태는 한계에 달한 것 같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다시금 교회로 몰려오게 만들 수 있는가?

먼저, 청년들에게 들리는 설교를 하라.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을 붙들고 잠시만 대화를 나누어보라.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말씀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데, 도대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믿음이 생길 리도 없고,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러면 왜 청년들에게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인가? 나는 그 이유가 복음의 내용, 복음 전파의 방법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열린 예배\'라 하여 젊은이들에게 연극이나 다른 멀티미디어로 접근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모르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필요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는가? 죄인에게 대속의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삼일교회에서는 단순히 십자가와 복음만을 강조하며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년들이 모여든다. 왜?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년들을 살리는 설교의 관건은 방법의 문제도 아니고, 복음의 내용의 문제도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쉽게 설명하면, 복음 자체의 능력으로 어떤 영혼이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청년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부산에서 올라온 한 형제와 또 다른 친구가 함께 자취를 했다. 그런데 한여름에 그 부산 형제가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쿠르트 줘! 야쿠르트 줘!\" 너무나도 엉뚱한 요구에 룸메이트가 \"자다 말고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핀잔을 줬다. 또 조금 자다가 그 형제가 다시 일어나서 똑같이 말했다. \"야쿠르트 줘! 야쿠르트 줘!\" 어이가 없어진 룸메이트가 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잠 안 자고 뭐 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런데 또 조금 있다가 부산 형제가 다시 일어나서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화가 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센 바람을 일으키며 돌고 있는 선풍기를 꺼버리는 것이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사람은 서울 사람이 알아 듣기에는 발음이 부정확하다. 이 부산 형제가 자는데, 선풍기 바람이 너무 센 것이었다. 그래서 룸메이트에게 바람이 너무 세니까 선풍기를 \"약으로 틀어줘.\"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듣는 형제는 이것을 계속해서 \"야쿠르트 줘.\"로 이해한 것이다. 한 쪽에서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화가 난 것이고, 한 쪽에서는 왜 밤중에 깨서 야쿠르트를 달라고 하는지 이해하지를 못한 것이다.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으니, 이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와 똑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강단에서는 열심히 \"잘 때는 선풍기 바람을 세게 틀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약으로 틀어줘!\"를 외치는데, 앉아서 듣고 있는 젊은이들은 왜 밤에 야쿠르트를 달라고 하냐면서 어리둥절해하는 것이다. 문제는 강단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강단용어는 청년들에게는 외국어만큼이나 들리지 않는 머나먼 이국의 언어인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강단언어의 갱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렵더라도 목회자들이 좀더 발버둥쳐야 한다. 청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그들이 알아듣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일반의 코미디계를 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리던 기성 코미디언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이름도 잘 모르는 신진 개그맨들이 텔레비전의 화면을 다 장악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들의 언어 때문이다. 청년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밀리기 시작하니까, 코미디계에서도 발붙이고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강단언어가 갱신되지 않으면, 가톨릭이 중세에 교인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 설교로 모든 교인들을 무너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자라나는 성장세대를 말씀을 모르는 암흑시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언어를 알기 위해 베스트셀러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인터넷의 대화방이나 게시판에 들어가서 청년들의 언어에 대해서 연구해야 한다. 좀더 쉬운 언어, 좀더 생활용어에 가까운 언어로 생명의 말씀을 풀어주는 것, 이것은 사명이다.

청년들의 처절한 싸움을 아는가

또 하나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청년들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적용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반문한다. \"도대체 그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삶의 현장 속에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청년들에게 강단에서는 흘러간 옛노래 같은 소리들만 흘려보낸다. 이런 메시지가 청년들의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이런 모습은 심지어 청년사역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최근에 몇몇 청년사역자들이 청년사역에 관한 책을 냈다. 나는 그 내용을 보면서 통탄했다. 왜? 현장에서 청년사역을 담당한다는 사람들이 최근의 청년들의 흐름을 거의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년사역의 이슈로 이런 것들을 들었다. \"몇 살부터 청년부와 대학부로 나눌 것인가?\" \"교회와 선교단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의 이성교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방학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는가?\" \"교회는 청년 전담 사역자가 있어야 성장한다.\" 등등.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몇 십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런 질문들은 70년대의 선배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이다. 교회 안의 모순을 해결하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운동을 벌이던 1세대의 고민인 것이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과 문제가 그런 교회 내적인 소꿉장난 같은 문제인 줄 아는가? 청년들의 고민은 캠퍼스와 직장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세상을 뒤집어 엎는, 세상에서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교육에서의 사활은 목표에 달려 있다. 즉, 어떤 인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착실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그것에 맞는 접근을 해야 하고, 세상에서 강한 젊은 사자 같은 사람을 만들려면, 또 그것에 합당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교회 내부용 인재만 양산해냈다. 그래서 예수 좀 잘 믿는다 싶으면 다 신학교로 갔다. 그래서 교회의 청년들은 텅텅 비어가는데, 신학교는 부흥에 부흥을 거듭한 것이다.
엄밀히 생각해보라. 신학교보다 예수 믿기 편한 곳이 어디 있는가? 걱정 없이 공부하고, 우리의 영적인 싸움의 현장인 세상 속의 불신자들은 만날 기회도 없고, 기껏해야 믿는 자들의 사소한 몇 가지 비리를 보고 분노하고, 눈물흘리고, 기도하면 되는 곳 아닌가?
그러나 일반사회의 삶의 현장에 가보라. 책상 위로 상사가 던진 재떨이가 날아다니고, 예수의 이름을 고백하는 순간이 곧 핍박의 대문에 들어서는 자리이다. 날마다 세속문화의 위협 속에서 다니엘과 같이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정말로 헷갈리는 문제들이 파도와 같이 매순간 밀어닥친다.
이들이 풀어야 할 문제는 설교 때 들은 말씀 몇 구절로 해결되는 표준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응용이 요구되는 난해하고 처절한 생존의 문제이다. 그것도 순간순간 풀어내지 못하면, 낙오되고 쓰러져야 할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이런 험난한 세상 속에서 이런 문제들에 강한 사람을 키우는 것, 세상에서 생존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인간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세상에 강한, 세상을 어지럽히는 강한 용사를 키우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요셉과 다니엘을 보라. 이들은 성경을 창으로 본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변화시켰다. 이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밀려난 패배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의 핵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경륜을 가지고 통치했던 자들이었다. 나는 교회가 이런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일은 주님과 함께\"라는 구호를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나머지 6일은 마귀와 함께\" 지내겠다는 말인가? 나는 이 구호가 패배주의자들이 만든 용어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사람들을 격려하라

지금의 기독청년들은 세상에서 승리하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 그 해답을 주는 교회에 당연히 벌떼같이 청년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영광\'과 \'성공\'을 추구한다. 영광이 있는 곳, 열매가 맺혀지는 곳, 승리가 주어지는 그룹에 소속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교회의 상황은 어떤 모습인가? 20,30명의 패배자 그룹들이 모여 있는 곳이 되었다. 사회적 낙오자들이 소일하는 곳이 되었다. 기껏 성공해야 신학교에 삼수 끝에 입학하는 사람이 모델이 되는 곳이 되었다. 과연 누가 이런 그룹에 매력을 느끼겠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서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사회에서 믿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곳에 어찌 젊은이들이 모일 수 있겠는가?

이런 주장에 교회는 항상 이런 반론을 펴왔다. \"하나님은 약하고, 지혜 없는 자를 사용하셔서 강하고 똑똑한 자들을 누르신다.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교회도 이런 세상의 영향력을 배설물과 같이 버려야 한다.\" 명심하라.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미 다 갖추고 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 준비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그래서 그에게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아무런 무장도 되어 있지 못한 자가 \"나는 세상의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하면, 세상이 웃는다. 명심하라. 바울의 고백은 갖춘 자의 고백, 준비된 자의 고백인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이런 백수건달들은 중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백수들에게는 거룩한 핍박이 필요하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증거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말씀을 들고 영향력을 미치며, 그 처절한 싸움터에 있는 현장의 사람을 위한 말씀이 증거되어야 하고, 현장의 사람들에 대한 격려가 교회의 주사역이 되어야 한다.


비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라

예수를 믿는 형제들 가운데 상당수는 너무 \'값싼 은혜\'만을 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 꿈 때문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그 꿈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는 거부한다.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이제까지 교회는 너무 허황된 젊은이들을 키워왔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데, 준비된 모습을 보면 사회낙오자들이다.

일주일 동안에도 여러 명의 선교사 지망생들이 나를 찾아온다. 대부분 선교사 지망생들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다. 내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의 비전에 대해서 거의 광기어린 표정으로 외쳐댄다. \"중국이 나를 부릅니다!\" \"모슬렘이 나를 부릅니다!\" 한참 듣다가 딱 한 가지 질문을 해본다. \"자네 토플 성적 몇 점인가?\" 이 한 마디에 그렇게 뜨겁게 떠들던 사람이 고개를 팍 숙인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중국이 부른다기에 중국어를 얼마나 하냐고 물으면, \"북경 가서 배우겠다.\"고 외친다. 모슬렘이 부른다기에 아랍어를 얼마나 하냐고 물으면, \"아랍 가서 배우겠다.\"고 대답한다. 한심한 일이다.

종종 목사 후보생들이 찾아온다. 자신의 소망은 설교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21세기를 뒤집어엎는 설교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묻는다. \"일주일에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 그러면 책은 안 읽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대답한다. 어찌 독서 없이 탁월한 설교가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양산되니까, 내용은 전혀 없고, 소리만 질러대는 설교가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는 설교 준비를 안 하고도 설교를 잘 한다고 항상 자랑을 하고 다녔다. 자신은 사택에서 교회에 오는 사이에 설교 준비가 끝난다고 자랑조로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 다음해에 당회에서 무슨 결정을 내렸는 줄 아는가? 사택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했다고 한다. 왜? 설교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세상 만사는 대가를 지불하는 정도만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나는 우리 청년들에게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곧장 그 꿈에 대해 무슨 대가를 치르는지를 확인한다. 전체 청년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대가가 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을 때, 혁명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직장과 캠퍼스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드러내는 한 명의 엘리야를 만들라

얼마 전까지 성경책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능력은 그 복음을 자신있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나는 청년들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드러내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드러냄을 통해서 주도권을 장악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보통 엘리야의 낙심을 이야기할 때, 엘리야 말고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드러내지는 않지만, 숨어서 기도하는 이런 7천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설교한다. 나는 이것이 넌센스라고 본다. 숨어지내는 7천 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도대체 얼마만한 일을 이루었는가? 오히려 생명을 걸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싸웠던 엘리야 한 사람을 통해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바퀴벌레 같은 7천 명보다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일어서는 한 명의 엘리야를 키우고 싶다. 우리는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의 깃발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동성연애자들에게는 \'커밍 아웃\'(coming out)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의식을 말한다. 동성연애가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인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범죄 중의 범죄가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그 수치스러운 사실도 자랑스럽게 만천하에 드러내지 않는가? 우리가 가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는 이 복음이 자랑스럽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과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왜 숨기고 다니는 것인가?

나는 어느 곳이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어느 곳에든지, \"주님!\" 하고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 청년을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은 엘리야같이 담대하게 외치는 이런 청년들을 통해서 세상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긍정적인 대안 세력을 키우라

기독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았거나, 성경공부를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지극히 비판적이다. 마치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비방이라도 가지고 있는 양 쉽게 말을 해댄다. 나는 이런 비판자들을 보면 밥맛이 없어진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교회라는 현실 속에 들어와 보라. 그 안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모순들과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현장에서 처절하게 싸워나가야 몇 년이 지나 겨우 하나의 대안을 발견하곤 한다. 책상 앞에서는 모든 문제가 간단해보이고, 정답이 단순해보여도, 현장에서는 그렇게 해답이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한 가지를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대안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고 가르친다. 이런 훈련이 되어 있다보니, 항상 책임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간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이 길을 걸어갈 때, 결국은 세상 앞에 해답을 주는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나는 요셉을 좋아한다. 왜? 그에게는 원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그 많은 은혜와 기적을 맛보고도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다 죽었다. 반면에 요셉은 원망할 만했다. 무고하게 노예로 팔려갔고, 못 생긴 아줌마의 유혹을 뿌리쳤다고 감옥에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은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면 풀어준다는 약속을 2년 가까이나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다. 얼마나 한이 맺힌 인생이며, 충분히 원망이 흘러나올 만한 상황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는 원망이 없다. 나는 이런 요셉과 같은 청년을 키우고 싶다. 반드시 이런 인간형의 성도를 만들어낼 것이다. 주변에서 몇 가지 주워듣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 성경공부했다는 것이 비판의 도구로만 쓰이는 사람, 교회의 현장에서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필설로 잘난 척하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생각한다. 현장으로 가라. 모든 영광은 현장에 다 숨겨져 있다.


\'기도의 무릎\'은 \'비전의 날개\'를 달고

수필과 설교의 차이는 반복에 있다. 수필에서는 반복이 치명적이다. 그러나 설교에서는 반복이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도 씨 뿌리는 비유를 여러 차례 반복하셨다. 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새로운 내용 80퍼센트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 20퍼센트를 가미한다. 이것을 나는 \'창조적 반복\'이라고 부른다. 이런 반복이 있어야 성도들의 삶의 기초가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반복은 성도의 삶 가운데 말씀이 메아리치고 공명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강단에서 선포한 말씀을 책으로 담아내면서 이런 부분을 일부러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성도들과 같이 독자들에게도 말씀의 공명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원래 설교로 준비된 원고이다. 원래의 설교에는 이 책의 내용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활자화시키기에는 부담되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상당 부분 순화시킨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러다보니 설교의 강한 공격적인 맛이 사라진 듯하여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순화된 말씀을 통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실 것이라 생각하니 일면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시편 강해를 시작하면서, 먼저 묵상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려 했다. 온 성도가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2000년 한 해는 온 성도가 기도하는 한 해로 삼기를 작정했었다. 그런데 시편 강해를 더해가면서 이 \'기도의 무릎\'은 \'비전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시작은 무릎이었으나, 항상 설교의 결론은 비전으로 끝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심하다가 제목을 \'비전무릎\'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들이 무릎으로 시작하여 비전으로 끝을 맺는 열매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영락교회에서 나흘간의 \'전국청년부흥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제 둘째 날의 집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연일 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여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부흥을 맛보고 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인 청년들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이 땅에 분명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제 복음 들고 현장으로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많은 청년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삼일교회 전 병 욱 목사


프롤로그
섹션1 비전 휘파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함성
존귀한 자는 심장에 아로새긴 비전이 다르다
비전 인생이 못 넘을 장벽은 없다

섹션2 비전 함성으로 솟구치는 복자의 우물
1부 인생 미로의 출구를 찾는 비전 설발대
1장 비전의 복인-복인의 참정체
2장 비전의 역전-세상의 음모를 분쇄하라
3장 비전의 호명-부를 이름이 있는가?

2부 미지의 세계에 길을 닦는 비전 탐험대
2장 비전의 간구-잠들기 전에 기도하라
5장 비전의 방패-새벽에 부르짖으라
6장 비전의 애통-변화의 문을 여는 회개
7장 비전의 찬송-역경을 이기는 거룩의 휘파람

3부 꼬인 관행과 상직을


전병욱
연약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영적 호연지기를 불어넣어줘서 강골의 ‘청년신앙인’으로 키우는 데 집중하는 삼일교회의 담임목사. 많은 교회들이 복음에 패배의식을 가지고 심리상담, 처세술, 교양강좌, 취미활동, 프로그램 등에 매진하는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십자가 복음에 집중하는 전도자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확신을 가지고 구령사역에 매진한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라고 했지만, 전병욱 목사의 한 손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 ‘문사철’이 들려 있다. 그래서 성경의 복음이 그의 손에 쥐어질 때에는 2천 년 전의 언어가 아니라 ‘리얼 타임’ 복음으로 번안된다. 복음의 전령인 전병욱 목사, 그는 오늘 우리에게 ‘Sola Gratia(오직 은혜), Sola Fide(오직 믿음),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에 집중할 것을 촉구한다. 전병욱 목사는 «돌파력», «집중력», «생명력», «자신감»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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